[월드경제=안성빈 기자] 네덜란드가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기업인 ASML의 이탈을 막기 위해 예산 25억 유로(우리돈 약 3조 7000억원)를 투입키로 결정했다.

최첨단 반도체 기업에 대한 유치 전쟁이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국기업이 떠난다면 기술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28일(현지시간) 로이터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ASML 본사가 있는 에인트호번 지역 인프라 개선 등의 지원책이 담긴 이른바 '베토벤 작전' 계획을 공개했다.

에인트호번의 주택, 교육, 교통, 전력망 등을 대대적으로 개선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와 함께, 새로운 세제 혜택안을 의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네덜란드 당국은 "이번 조치에 따라, ASML이 법상, 회계상 그리고 실제 본사를 네덜란드에 계속 유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성명서를 통해 밝혔다.

이같은 대책이 나온 건, ASML이 최근 정부 정책을 이유로 본사 이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 정부가 다급해졌다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ASML은 정부의 반(反)이민 정책 때문에 고급 인력 확보가 어려워졌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실제로 ASML 네덜란드 본사 직원 2만3000명 가운데 40%가 외국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의회는 최근 고숙련 이주노동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없애는 안을 가결한 바 있다.

인프라 부족도 ASML 측의 불만이다. ASML은 정부가 에인트호번 '기술 허브'의 급성장을 적절한 인프라 투자에도 실패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부가 파격안을 내놨지만, ASML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ASML은 성명에서 "오늘 발표된 계획이 의회 지지를 받는다면 사업 확장과 관련한 최종 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계속 협력할 것"이라면서도 "우리가 취하려는 결정은 (네덜란드에) 계속 머무를지가 아닌 어디서 확장할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ASML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입장에선 ASML 본사 이전은 자국 경제에 큰 타격이다.

네덜란드가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기업에 대규모 지원하기로 한 결정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으로 시작된 반도체 기업 유치 경쟁은 우리나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대기업을 향한 특혜가 아닌, 현재와 미래의 먹거리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는 인식의 전환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투 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행보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과 일본 등 경쟁국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수십조 원 단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소규모 지원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

인텔과 엔비디아 등 경쟁사들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묵은 '특혜 시비' 탓에, 우리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라는 목소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