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부자가 되는 방법, 부자들의 자산에 관한 의식이나 원칙 따위를 밝히는 학문"

국어사전에 수록된 '부자학'에 대한 정의입니다.

부자가 된 인물들이 걸어오면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보는 것, 이를테면 자산을 모으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부자가 된 뒤에는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도 부자학의 한 분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 통해 부자들의 원칙과 철학 등을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월드경제신문>과 <트래블라이프>가  함께 마련한 기획 연재 <부자의 발자취>를 통해, 그들이 걸어온 길을 함께 걸어봅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그들이 세운 원칙과 철학 등을 공유해봅시다.

[월드경제=유상석 편집국장] 부산에는 특이한 절집이 하나 있다. 우선 절집 명칭 앞에 조계종이니 천태종이니 태고종이니 하는 종단명이 붙지 않는다. 보통 그런 경우는 스님 개인이나 특정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사설 사암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절집은 그렇지도 않다. 재단법인이다.

이름도 특이하다. '사(寺)', '암', '선원'등의 단어가 들어가는 여느 절집들과는 다르다. '동명불원'이다. 얼핏 들으면 홍콩 소설·영화 '동방불패'가 떠오르는 이름이다.

심지어 절집의 생김새 마저 특이하다. 기와지붕의 모양부터가 다른 절집들과는 다르다. 동남아시아 어느 국가의 사찰을 둘러보는 듯 하다.

당연하다. 애초에 동명불원은 전통사찰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973년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이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임직원의 행운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열대지방의 원목을 수입해 합판 등을 제작하는 게 주요 사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건축 양식은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용마루가 곧게 뻗었고, 미얀마의 오래된 탑에서 발굴됐다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동명불원 측 설명에 따르면, 이 절집의 범종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에밀레종보다도 6톤 가까이 무겁고, 대웅전 본존불인 목조 좌불 석가세존상은 높이 16m로 전국 최대 규모 불상이라 한다.

크고 아름답게 지은 이 절을, 강 회장은 1976년, 운영기금 2,000만원과 함께 부산시에 헌납했다. 이후, 부산시가 재단법인을 만들어 동명불원을 관리하고 있다. 부산시에 헌납된 사찰인 만큼, 재단 이사 15명 중 부산시 추천 인사가 7명이다. '부산시가 소유, 운영하는 사찰'이라고 표현해도 얼추 맞는 셈이다. 그래서 동명불원은 '시민사찰', '시민기도도량'을 표방하고 있다.  한 때 조계종 사찰인 범어사가 동명불원을 위탁 운영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 ⓒ 동명대학교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 ⓒ 동명대학교

1907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강석진 회장은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부산으로 옮겨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에 취직했다. 만 18살에 동명제재소를 개업한 강 회장은 몇 년 뒤 동명목재상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이후 가구상점, 합판공장 등을 차려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생하면서, 사업은 본격적인 호황을 맞았다.

공장 화재와 사라호 태풍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열대지방에서 나왕 원목을 수입해 합판을 제작하면서 사업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아갔고, 빠른 속도로 확장됐다.

70년대 들어서 강 회장은 동명목재 외에도 동명산업, 동명제지, 동성해운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집단 '동명그룹'의 총수가 됐고. 부산은행, 부산투자금융 등 금융사 설립에도 관여했다. 동원공업고등학교(지금의 동명공업고등학교)와 동원공업전문대(나중에 설립된 동명정보대학교와 통합해 지금의 동명대학교가 됨) 등 여러 곳의 학교도 설립했다.

강 회장의 종교가 불교였던 터라, 동명불원 외에 진해 해군사관학교 내 사찰 '호국사'와 부산 군수사령부 내 법당 '금련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동명대 캠퍼스와 동명불원이 붙어있는 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동명목재는 1980년 갑자기 해체된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을 제외한 모든 사업장을 강제헌납당한 것. 이후 강 회장은 1984년 10월 29일, 남천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유족들이 그룹을 되찾기 위한 소송에 돌입했으나 2002년에 패소했다. 그러다가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동명그룹 해체는 신군부에 의한 강탈이 맞았다"고 확인하면서 고인의 명예만은 회복됐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법당들, 크고 아름다운 종, 마당을 지키고 있는 탑 등을 둘러본 뒤, 도량 뒷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작은 건물 세 동이 보인다.

우리나라 사찰의 특징은 토착 신앙을 배척하기보다는 존중하며 '함께 간다'는 것이다. 동명불원도 이 특징을 받아들였다. 각 산을 지키는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 도교의 북두칠성 신앙을 받아들인 칠성각,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다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을 그래서 동명불원에서도 볼 수 있다.

동명불원 '앞마당'이 이국적인 동남아의 사찰을 보는 느낌이라면, 이들 세 전각이 자리잡은 '뒷뜰'은 조용히 사색하며 산책할 수 있는 오솔길 같은 인상이다.

동명불원을 떠나려는 무렵, 문득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만 아는 아픔들이 다 치유되기를. 그를 용서할 수 있기를. 그를 미워하면서 나 스스로를 괴롭혔던 나 자신 또한 용서할 수 있기를"

부산사람들이 부산을 일컫는 자조적인 표현 중 하나가 '노인과 바다'다. 부산에 있는 거라곤 노인과 바다 밖에 없단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니, 젊은이들은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빠져나간다. 팍팍한 경제사정과 높아지는 평균 연령. 이를 씁쓸하게 비유한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어떤 곳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동명목재가 강제 해산당하지 않았다면, 부산의 경제는, 부산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지금쯤 어땠을까?'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 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명목재가 사라진 건 강 회장과 유족들 뿐만 아닌, 부산사람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아픔은 치유될 수 있을까.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트래블라이프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