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경제신문】이제나 저제나 자식이 한번 더 보러오길…그 깊은 속내에 자녀들이 늘 살아있음을!

가정의 달이 벌써 재빨리 지나가고 있다. 어느새 어버이날도 슬그머니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예컨대 제목을 붙여서 기려야 할 만큼, 평소에는 잊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미 우리에게 어버이날은 매일 매일이어야 한다. 고작 한 해에 하루, 달랑 이름 만들어서 축하해드리고, 선물하고, 꽃 달아드리고, 맛난 것 사드리면 되는 게 어버이의 은혜가 아니다. 어쩌면 괜히 그런 날을 제정해서 세상의 온갖 불효 자식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날 잡아서 돈 푼깨나 지출하고 나면 괜히 효도를 마음껏 한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지고, 자랑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히는 게 정말 정상인가? 이제 내년 어버이날까지는 큰 관심 끊고 마음 편하게 지내도 무방한 건가? 솔직히 필자는 잘 모르겠다.

지금 필자가 어버이께 얼마나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건지, 남에게 과시하고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서 효도의 탈을 쓰고 겉치레에 급급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의 만족에 도취되어 이만 하면 되었다고 상한선을 정해놓고 적당히 흥정과 거래의 심정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다 모르겠다.

아흔이 가까우신 연세의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필자의 사회생활에 각종 걱정근심을 이어가고 계시다. 물론 깊은 산골의 어느 요양원에서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라는 명분 하에) 편안하게 거주하고 계시지만, 그래서 자유도 의지도 이미 다 잊으신 채 그저 하루날을 의미 없이 팔자 좋게 지내고 계시지만, 이제나 저제나 자식이 한 번 더 보러 와주기를 고대하시면서 늘 먼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고 계시지만, 그 깊은 속내에 자식이 늘 살아있음을 필자는 안다. 다 안다. 그냥 모른 척 할 뿐이다. 그래야 편하니까.

혹시라도 불효자라는 이름으로 남겨지기는 싫어서, 행여나 불효의 불이라는 단어라도 튀어나올까봐, 모처럼 찾아가서는 앉자마자 돌아나올 궁리만 해대는 주제에도,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는 효자라는 이름으로 기억에 남겨져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비루하고 치졸한 행태인가? 다 알면서도, 이미 모든 걸 알면서도 그저 행실은 무대포다. 그냥 밀어 붙인다. 내 방법이 최선이며 최상이라고 세상을 향해 마냥 악을 써댄다.

허기사 필자라고 왜 할 말이 없을까? 변명이나 핑계를 대자면 하늘까지 닿는다. 당장 먹고 살기 급급한 현실에서 시간이나 여윳돈을 만들기란 여간 힘겨운 노릇이 아니다. 꽉 짜여져 돌아가는 일과 속에서 어떡하든 조금이라도 짬을 내고,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살림살이에서 궁색하나마 조금의 돈이라도 빼내어 지출하는 것도 사실은 버겁기 짝이 없다. 그것이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팔자타령에 목청 높였던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이제 환갑이 지난 이즈막에 달하여 되돌아보니, 모든 이유나 명분이 한낱 물거품이요, 가없는 허접쓰레기였다. 부모님의 마음을 대관절 얼마나 알고 있다고 함부로 평가하고 비판하고, 짧디 짧은 자로 재려고 들었단 말인가? 이런 우매하고 미련한 자식을 위해서 오늘도 맑지 않은 정신 모두워 기도 올리고 있을 어버이시거늘.

소아마비로 인해 딸이 몸이 성치 않기에 이태 전에 부랴부랴, 한 쪽 다리가 불구인 사위를 얻어 떠밀다시피 시집을 보냈던 딸이었다. 언제나 어머니 마음 한 구석에 아픔으로 자리했던 딸이었기에, 더 바랄 것도 없이 그저 두 내외 잘 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느 사이 어머님의 눈가엔 눈물이 배어 나왔다. “참! 아브이, 어므이, 이거!” 하면서 딸이 카네이션 두 송이를 꺼내어 내미는 거였다.

“저 이가 어제 장터에 가서 사왔어! 이쁘지? 히히! 내가 달아드릴게.” 하면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아브이, 어므이, 오래오래 살아야 돼!! 알았지? 히히.” “그래, 알았다. 오래 살으마! 너희들도 행복하게 잘 살아라! 박서방 정말 고맙네.” “아니에요, 장모님! 두 분 정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유.” “그려, 그려, 정말 고맙네!!” “아브이, 어므이, 어서 이 쑥떡 먹어봐. 맛이 어떨런지 몰라. 히히!”

“그래, 알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쑥 버므리떡을 입에 넣으며 목젖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눈가엔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참으며 “그래, 참 맛있구나!! 이렇게 맛있는 쑥떡은 처음 먹어보는구나. 당신도 그렇지요?” “흠흠, 으응....” 아버님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참!! 술, 술!” 사위가 잊었다는 듯 보따리에서 술병을 꺼냈다. “이거 아브이 어므이 드린다구 박서방이 산에서 캔 산삼주야. 작년에 산에 갔다 캤는데, 팔자구 해두 장인어른 드린다구 안 팔구 술 담은 거야.”

“박서방이 산삼을 캤구먼.” “네! 작년에 매봉산에서 한 뿌리 캤시유.” “에구!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산삼주를 받아든 아버님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생 홀아비로 늙어갈 몸인데 저렇게 이쁜 색시를 주셔서 넘 고마워유.” “무슨 소린가? 몸도 성치 않은 자식을 받아 준 자네가 고맙지!!” “아녀유!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색시구먼유.” “그려, 그려, 앞으로도 못난 자식 잘 부탁하네!!” “장인 장모 어르신, 오래오래 사세유.”

아버님은 눈시울이 뜨거워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하고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병신 자식이라 불쌍하게만 여겼지, 아들처럼 공부도 안 시키고, 결혼식도 못 올리고 그냥 시집을 보낸 딸 자식이었는데, 그저 시집보냈으니 있는 듯 없는 듯 신경 안 쓰던 그 자식이, 어버이날이라고 이렇게 불쑥 찾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욱이 부모가 좋아하는 쑥 버므리떡을 밤을 새워가며 해가지고 올 줄이야.

평생 이렇게 맛있는 떡을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이든 아들 형제만 주려고 생각했지 병신 딸은 언제나 안중에 없었다. 행여 병신 자식이라고 업신여겼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불구의 몸이지만 딸의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이제서야 알았다. 아들들 때문에 서운했던 마음이 딸로 인해 다 풀어졌다. 먼 아들보다 가까운 딸 자식이 소중한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러면서 가슴 저 깊은 곳이 아려왔다.

정말 딸 자식이 고마웠다. 아니, 많이 미안했다. 한참 뒤, 밖에서 씨암탉 잡는 소리가 들렸다. 잘난 자식들 주려고 키웠는데, 못난(?) 딸자식 주려고 잡나보다. “우리 귀한 사위 줄려고 장인어른이 씨암탉 잡나보네.” “어이구, 황송해서 어쩌지요? 장모님?” “아닐세. 자네는 씨암탉 먹을 자격 충분하네!!” “장모님, 고마워유.”

옛 말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했던가? 몸도 성치 않은 딸 자식이 진정한 효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효(孝)’라는 것을 몇 가지로 정해서 말할 수는 없으나, 품 안의 자식인 것처럼 살아 생전의 효도가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주자 10회훈’ 중에도 ‘불효부모 사후회(不孝父母 死後悔)’가 으뜸이듯,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도하지 아니하면 돌아가신 후에 반드시 후회한다 하는데 우리는 이 소중한 진리를 얼마나 가슴으로 새기고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