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무죄→항소심 벌금 100만원→대법원 무죄 취지 파기환송

[월드경제/사회]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허락 없이 도용했더라도, 그 사람인양 행세할 목적이 아니었다면 형사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보험대리점 업체 P사의 총무과장인 박OO(44)씨는 2007년 1월 H생명보험회사와 보험모집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직장상사인 팀장으로부터 H보험사에 건넬 보험모집 유자격자의 명단 제출을 요구받았다.

이에 박씨는 이미 퇴사한 김OO씨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마치 현재도 근무하고 있는 것처럼 김씨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한 P사의 법인대리점 임원 및 유자격자 명부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는 보험모집 유자격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험모집을 많이 할 수 있어, 보험모집 법인대리점 계약체결과 관련해 P사와 H보험사에게 모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박씨는 주민등록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고, 1심인 서울남부지법 정영훈 판사는 지난해 12월 “피고인이 상사의 지시를 받고 명단을 작성한 것일 뿐 계약체결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검사가 항소했고, 항소심인 서울남부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이승호 부장판사)는 지난 5월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박씨에게 유죄를 인정해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보험모집 유자격자 명부에 퇴사한 김씨가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점을 알면서도 권한 없이 김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기재한 명부를 작성해 이를 상사인 팀장에게 전달해 명부가 H보험사와의 계약체결에 사용되도록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정사용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제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퇴사한 직원의 주민번호를 도용한 혐의로 기소된 박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서울남부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고 27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먼저 “주민등록법은 공적ㆍ사적인 각종 생활분야에서 주민등록번호 소지자의 허락 없이 마치 그 소지자의 허락을 얻은 것처럼 행세하거나 자신이 그 소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규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그 소지자의 허락 없이 함부로 이용했다 하더라도 그 주민등록번호를 본인 여부의 확인 또는 개인식별 내지 특정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경우 주민등록번호 부정사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고인과 같이 상사의 지시로 퇴사한 김씨의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된 법인대리점 보험모집 유자격자 명단을 제출한 행위만으로는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신분확인과 관련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없어 주민등록번호 부정사용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피고인에게 유죄로 인정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