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고법 “최전방서 국토방위 위해 꽃다운 청춘 바친 점 참작”

[월드경제/법원] 최전방 해군기지에서 레이더 감시병으로 복부하다 정신분열증이 발병한 예비역이 항소심 법원에서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통상 선임병의 구타나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정신질환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왔으나, 이번처럼 가혹행위가 없었더라도 직무의 특수성을 인정해 국가유공자로 인정한 경우는 드물어 선례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법원은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반복되는 최전방에서 오로지 국토방위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점을 참작해 국가유공자로 인정함으로써 명예회복과 권리보호를 취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J(42)씨는 1987년 6월 해군에 자원입대해 우리나라 최전방에 위치한 해군 전탐기지의 탐지병(레이다 감시병)으로 배속돼 하루 8시간씩 교대로 레이더를 감시하고, 레이더에 이상 물체가 발견되는 즉시 부사관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J씨는 비록 지능지수가 경계성지능(지능지수 85 이상을 정상지능, 70 이하를 정신지체, 71~84는 경계성 지능인데 J씨는 84)에 해당했지만 학교생활과 입대전의 건강상태 및 입대시의 신체검사결과 모두 양호한 상태였다.

그런데 J씨는 입대 후 2년4개월 정도가 지난 1989년 10월 정기휴가를 나왔는데, 갑자기 휴가 중 가족들과 대화가 안 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등의 이상증세를 보여 민간병원을 찾았다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이후 국군병원에서 계속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호전이 안 되다가 이듬해 4월 만기 전역했다. J씨는 지금까지도 계속 정신분열증에 대한 치료를 받아 오다가 2007년 10월 국가유공자등록신청을 했다.

하지만 경주보훈지청은 “J씨에게 특별한 외상력이 확인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정신질환은 선천적ㆍ기질적 질환으로서 공무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J씨는 군복무 중에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선임병들의 구타와 기합에 시달린 결과 정신분열증이 발병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 1심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 결국 정신분열증 생겨”

1심인 대구지법은 지난해 12월 J씨가 경주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등록거부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는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받으면서 선임병들의 구타행위나 업무상의 애로점에 관해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표시한 바 없고, 스스로도 군대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진술한 점에서 원고의 주장과 같이 선임병들로부터 반복적인 구타와 기합에 시달렸다고 볼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가 선임병들과의 관계나 업무로 인해 다소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것이 정신분열증의 내적 소인을 촉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스트레스에 취약한 소인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볼 때, 약간의 발병시기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 발병할 사람에게 정신분열증이 생기는 것”이라며 “따라서 원고의 정신분열증이 공무수행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 항소심 “업무특성상 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 받았을 것”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대구고법 제1행정부(재판장 최우식 부장판사)는 지난 4일 원고 패소 판결한 1심을 뒤집고, “국가유공자등록거부는 위법하다”며 원고 J씨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의 복무환경은 다른 부대에 비해 열악할 뿐만 아니라 북한군에 의한 도발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어서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인데, 하루 3교대 레이더 전탐병이라는 업무의 성격에 비춰 원고가 업무수행으로 상당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쉽게 예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가 입대하기 전까지 별다른 정신과적 이상 없이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해 왔을 뿐만 아니라 입대시의 신체검사결과도 양호했으며, 입대 후 2년4개월 정도가 지나 정신분열증세가 발병한 점 등에 비춰 보면, 원고가 최전방 부대에서 전탐병 직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스트레스를 계속 받아 정신분열증이 발현 내지 악화됐다고 충분히 추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따라서 원고의 군복무와 정신분열증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할 것이므로, 인과관계가 없다고 봐 원고의 국가유공자등록신청을 거부한 처분은 위법해 취소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 대구고법 “유사사건 선례적 가치”…군당국에도 근무환경 개선 당부

이번 판결에 대해 대구고법은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대구고법은 “선임병의 구타나 가혹행위 또는 폭발사고나 총기사고의 경험 등 뚜렷한 외래적 요인에 기인한 군인의 정신질환에 대해 군인의 직무수행과 질병의 발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한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이 사건과 같이 직무의 내용과 특수성을 고려해 정신질환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경우는 흔하지 않아 유사한 사건의 선례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원고의 정신분열증이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매일 반복되는 최전선 전초기지의 전탐병으로 장기간 복무한 후에 발생한 점 등을 중시해 국가유공자로 인정함으로써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오로지 국토방위를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던 원고의 명예회복과 권리보호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군당국에도 “비무장지대 내의 감시초소(GP)나 최전방 전초기지, 고립된 도서지역 등에 사병을 배치할 경우에는 사전에 충분한 적성검사나 심층면담 등을 통해 적격자를 선발ㆍ배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병들이 복무 중 받게 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할 수 있도록 근무환경을 조성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